월드컵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올시즌 프리미어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는 두 명의 아시아 선수가 있다. 에버튼과 풀햄에서 미드필더로 활약 중인 중국, 일본 국가대표출신의 리 티에와 이나모토가 바로 그들.

 

올시즌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에버튼의 주전 미드필더인 리 티에는 2경기를 제외한 모든 경기에 선발출장하며 당당히 실력으로 ‘돈 때문에 데려온 천덕꾸러기’라던 자신의 평가를 완전히 벗어버렸고 풀햄의 이나모토 역시 25경기 출전에 6골(유럽컵 포함)을 기록하는 등의 맹활약으로 월드컵에서의 상승세를 계속 유지해 나가고 있다.

 

이들의 활약을 지켜보며 아쉬움이 남는 인물이 바로 홍명보이다. 홍명보는 한일월드컵 이후 당시 월드컵에서의 뛰어난 활약상을 인정 받아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잉글랜드 유수의 클럽으로부터 영입제의를 받았지만 늦은 나이에 새롭게 도전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선수생활의 마무리는 한국에서 하겠다는 팬들과의 약속(결국 미국으로 떠났지만)으로 인해 유럽행을 포기했다. 그가 평소 “유럽리그에 진출하지 못한 것이 평생 아쉬움”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해왔기 때문에 아쉬움은 더 크다.

 

 

미국월드컵 그리고 동양의 베켄바워

1994년 6월 27일(한국시간), 댈러스 코튼볼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독일과의 미국월드컵 조별 예선리그 마지막 경기. 독일이 클린스만(2골)과 리들레의 연속골로 3:0으로 앞서 있는 상황에서 한국은 후반시작 7분만에 황선홍이 한 골을 만회하며 추격의지를 불태우고 있었다.

 

그리고 약 10분 후 한국 축구역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 나왔다. 후반 18분, 홍명보가 독일의 주장 마테우스를 오른쪽으로 제치고 날린 그림 같은 중거리슛, 마테우스가 왼발로 끝까지 슛을 저지하려 했으나 볼에 닿지 않았고 골키퍼 일그너의 손을 스치며 독일의 골문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리고 그는 한 팔을 높이 치켜올린 채 천천히 그라운드를 내달렸다.

 

비록 이후 일그너의 ‘신들린 선방’으로 추가득점에 실패하며 독일에 3:2로 아쉽게 패하고 말았지만 이 경기로 한국과 홍명보는 전 세계의 주목을 받았다. 예선탈락이 확정된 한국이었지만 세계 언론은 극찬을 아끼지 않았고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으로 일약 한국 최고 스타플레이어로 자리매김한 홍명보에 대해서도 ‘동양의 베켄바워’ 라는 찬사를 붙여준 것을 물론, 한 이탈리아 기자는 당시 그의 연봉이었던 5,300만원을 빗대어 ‘그는 20억 이상의 가치가 있는 선수’ 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열심히 노력했지만 떠날 수 없다!

미국 월드컵 이후 독일, 스페인 등 유럽에서 내노라하는 강호들과의 경기에서 2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홍명보에게 유럽 유수의 클럽들은 지속적으로 영입의사를 밝혀왔다. 하지만 소속팀 포항은 ‘한국 최고의 스타를 헐값에 보낼 수 없다.’ 라는 이유로 모든 제의를 거절하며 그의 유럽진출을 무산시켰고 결국, 홍명보는 “팀을 우승시킨 뒤 당당히 유럽으로 진출하겠다.” 라는 말과 함께 다음 시즌을 준비했다.

 

유럽진출을 위해 J리그 벨마레 히라츠카와 이스라엘의 명문 마카비 텔 아비브의 입단제의를 거절한 홍명보는 팀의 정규리그 우승을 위해 최선을 다했고 결국 팀을 챔피언결정전에 올려놓으며 유럽진출의 꿈을 이루는 듯 했지만 1, 2차전의 연이은 무승부로 3차전까지 치루게 된 성남과의 경기에서 연장전까지 가는 혈전 끝에 이상윤의 골든골로 아쉽게도 성남에게 우승컵을 넘겨주며 통한의 눈물을 삼켰다.

 

리그 우승에 실패한 포항은 “올해 지역연고의 법인으로 새출발한만큼 내년엔 꼭 우승해 명문팀의 입지를 다져야 하고 그러기 위해선 팀의 간판스타인 홍명보가 절대 필요하다." 며 그의 해외진출 시기를 늦추도록 종용했지만 유럽진출에 대한 그의 열망은 너무나도 뜨거웠다.

 

마침 홍명보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탈리아 세리에A의 파도바와 볼로냐(96/97시즌부터 세리에A 합류)는 96년 2월 그가 팀의 전지훈련으로 포르투갈에 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포항에 영입의사를 밝힌 후, 4~5일정도의 입단테스트기간을 요청했다. 하지만 포항은 “한국의 최고 선수에게 입단테스트제의는 말도 안 되는 일이다.” 라며 필사적으로 반대했고 홍명보 역시 구단의 강력한 반대에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말았다.

 

하지만 파도바와 볼로냐측은 '홍명보의 포항 내 비중이 큰 것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일단 입단테스트를 하고 입단이 확정되면 우선 계약만 하고 홍명보는 96시즌을 한국에서 보낸 뒤 96/97 시즌 중반에 이적을 시켜도 좋다'라는 양해까지 구했다는 사실은 다소 충격적이었다.

 

 

구단의 해외진출 허락! 그러나 그게 전부는...

96시즌을 끝으로 해외진출을 허락한다라는 포항의 동의 아래 스페인, 독일, 이탈리아 등 유럽의 빅리그팀들과 입단교섭을 시작한 홍명보는 96년말부터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세비야, 사라고사 등을 상대로 입단교섭을 벌였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그러던 중 분데스리가의 제의를 받았다.

 

특히 홍명보에게 많은 관심을 보인 팀들은 칼스루에 SC와 함부르크 SV 그리고 헤르타 베를린이었다. 특히 1894년 창단, 95, 96년 연속 UEFA컵에 나설 정도로 안정된 전력을 갖춘 칼스루에 SC는 팀의 기둥인 '리베로' 해슬러의 부상으로 인해 비상이 걸린 상태로 그의 공백을 메울 리베로감은 물론, 전체적인 전력강화를 위해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칼스루에나 홍명보 모두 가치를 정확히 매길 시간이 부족하다며 임대라는 형식에 뜻을 모은 후, 일단 6개월 임대로 분데스리가 96/97 후기리그부터 경기에 참여하기로 결정했고 홍명보는 6개월동안 자신의 진가를 보여준 뒤 완전이적으로 이적료, 연봉 등 정식 입단에 따른 절차를 밟을 작정이었다.

 

칼스루에 관계자는 미국월드컵에서의 활약과 세계올스타로 선정된 것 등을 언급하며 "한국선수 중 차범근에 이어 분데스리가 주전자리를 굳힐 스타" 라는 높은 평가를 내릴 정도로 홍명보의 분데스리가 진출은 거의 확실시 됐지만 이번에도 그의 발목을 잡은 건 구단이었다. 칼스루에에게 줄곧 임대로 30만불를 요구하며 자세를 굽히지 않았고 결국 어이없게도 또 다시 이적료문제로 유럽진출에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연이은 이탈리아 세리에A 삼프도리아에서의 입단제의도 역시 줄곧 이적료 150만불(당시 인터밀란으로 이적한 호베르투 카를로스의 이적료는 700만달러)을 요구하며 제의를 거절했다. 당시 홍명보는 입단테스트를 위해 이탈리아행 비행기 티켓까지 끊어놓았지만 헛수고를 한 셈이었고 그가 만약 삼프도리아 입단에 성공했다면 현 잉글랜드 감독 에릭손의 지휘 아래 아르헨티나의 세계적인 미드필더 베론과 프리킥의 마술사 유고의 미하일로비치 등과 함께 플레이하는 모습을 TV로 지켜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세계 올스타 그리고 다시 유럽으로!!!

결국 홍명보는 유럽진출에 실패하며 97년 5월, 94년부터 그에게 줄곧 관심을 보인 J리그의 벨마레 히라츠카로 이적료 130만달러, 연봉 70만달러에 이적하게 되었다. 유럽진출에 미련을 가지고 있던 그에게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다. 97년 12월 프랑스에서 벌어진 유럽올스타와 세계올스타의 경기가 바로 그것이다.

 

바티스투타, 호나우디뉴, 나카타 등과 세계 올스타에 선발된 홍명보는 지단, 클루이베르트, 복시치 등이 이끄는 유럽올스타를 맞아 오른쪽 사이드백으로 출전, 안정된 수비를 바탕으로 정교한 패싱능력과 노련한 플레이로 90분 풀타임을 무난히 소화해내며 팀의 5:2승리를 이끌었다.

 

당시 지단, 클루이베르트 등 세계정상급의 선수들을 상대로 효과적인 수비를 펼친 그에 대해 바르셀로나의 반 할 감독은 커다란 관심을 표명했고 당시 소속팀이던 벨마레 히라츠카에 입단제의를 표명했으나 견해차이로 흐지부지되었다. 하지만 98년 5월 다시 한번 공식적으로 홍명보의 이적을 요청한 바르셀로나는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그의 결정을 기다렸다.

 

유럽올스타와의 경기 이후 바르셀로나 외에도 많은 팀들이 그에 대해 많은 관심을 표명했는데 프랑스의 스트라스부르와 네덜란드의 NAC 브레다가 그 대표적인 팀이었다. 스트라스부르는 당시 ‘세오돌풍’을 일으키고 있던 서정원의 추천으로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고 NAC 브레다는 노정윤과 라데(전 포항)가 뛰어난 활약을 보여 한국축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 홍명보에 대해 커다란 매력을 느끼고 있는 상태였다.

 

홍명보는 "유럽진출은 오래전부터의 꿈이었다.4차례에 걸친 세계올스타 선발과 3연속 월드컵 본선무대를 밟는 경험이 자신감을 갖는데 도움이 됐다. 5월 안에 이적을 매듭짓고 대표팀에 합류해 프랑스월드컵에서 좋은 활약을 펼치고 싶다." 라고 밝히며 얼마남지 않은 자신의 유럽진출을 기다리고 있었다.

 

 

누구의 잘못인가? 선수? 에이전트?

98년 5월 15일, 별안간 홍명보가 3년간 매년 8천만엔의 연봉을 받는 조건으로 기존 소속팀인 벨마레 히라츠카와의 재계약을 발표했다. ‘홍명보가 지난 1년간 J리그에서 보여준 모범적인 생활과 경기력을 높게 평가하고 3년 후 지도자로 키운다는 차원에서 J리그 사상 처음으로 다년 계약을 해주기로 했다.’ 라는 것이 그 발표의 요지.

 

더구나 “상당히 만족한다. 일본도 현재 경기가 아주 좋지 않은 상황이어서 각 구단살림이 상당히 어려운 형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존심을 세워 준 구단에게 감사하며 월드컵이 끝나면 대우에 부족함이 없도록 팀에 봉사할 생각이다.” 라는 홍명보의 말과 “구단측은 유럽진출을 접어준 홍명보선수를 고맙게 생각하며 그를 명예롭게 은퇴시킨후 축구지도자로 키우기 위해 유학를 최대한 지원키로 했다.” 라는 에이전트의 말은 홍명보의 유럽진출을 갈망하고 있던 한국 축구팬들의 뒤통수를 친 셈이었다.

 

더 황당한 사실은 홍명보와 3년 재계약을 한지 고작 6개월만에 벨마레 히라츠카가 경영난으로 인해 팀규모를 대폭 축소함과 동시에 2군리그에서 철수하기로 결정하며 동시에 팀내고액연봉자들인 홍명보와 로페스를 다른팀으로 이적시켜 그 금액으로 경영기반을 다시 세우겠다는 의사을 표명한 것이었다. 결국 최고연봉자인 그를 이적료 5천만엔에 가시와 레이솔로 이적시켰고 이번에는 홍명보와 에이전트가 뒤통수를 맞았다.

 

물론 홍명보가 가시와 레이솔 이적 후 니시노 감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외국인 최초로 주장에 선임되는 등 최고의 활약을 보이며 J리그를 대표하는 외국인 선수로 일본에서의 선수생활을 마감하게 됐지만, 98년 5월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었던 해외진출기회에서 “유럽행을 포기해서 다소 아쉽지만 그 몫은 후배들에게 돌린 채 J리그 최고스타 자리를 지키겠다.” 라는 말과 함께 벨마레 히라츠카와의 재계약을 결정한 것은 홍명보 자신에게도 그리고 그를 사랑하는 팬들에게도 커다란 아쉬움으로 남을 것이다.

 

 

한국 축구의 또 다른 비극, 최순호

81년 세계 청소년대회에서 강호 이탈리아를 상대로 한국은 4:1의 놀랄만한 대승을 거뒀다. 2골 2어시스트를 기록하며 이탈리아의 수비진을 무참히 짓밟은 최순호가 바로 그 주역. 한국은 비록 브라질, 루마니아와의 경기에서 연이어 패하며 본선진출에 실패했지만, 최순호는 대회에서의 뛰어난 활약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고 특히 이탈리아의 명문 유벤투스는 대회 이후 멕시코월드컵이 열린 86년까지 5년 동안이나 그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유벤투스 수뇌진은 최순호의 플레이를 직접 보기 위해 4개국 초청대회가 열리고 있던 멕시코까지 쫓아갔지만 최순호가 부상으로 경기출전이 힘들게 되자 당시 한국팀의 단장에게 간청, 결국 알제리전 후반에 부상중임에도 한골을 기록하며 팀을 2:0의 승리로 이끄는 그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유벤투스는 그를 ‘축구가 무엇인지 알고 플레이 하는 선수’로 평가하며 지속적으로 영입을 시도했지만 결국 아무런 성과도 얻지 못한 채 그를 향한 5년간의 짝사랑을 마감해야 했다.

 

“유벤투스가 스카우트의사를 밝히고 5년간이나 쫓아다녔는데도 변변한 협상 한번 해보지 못한 경우는 전 세계에서 최순호가 유일할 것이다.” 라는 당시 유벤투스 스카우트의 말은 세계축구계의 사정에 무지했던 한국축구계에 대한 안타까움이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최순호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 이후 국내에서 은퇴하고 프랑스 2부리그에서 스위퍼를 보며 코치수업을 받았던 선수생활 마지막을 떠올리면 당시 유벤투스의 적극적인 구애가 더욱 안타깝게 느껴질 뿐이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스포츠 사회학자이자 축구 사학자인 빌 머레이는 94년 발간한 그의 저서 "세계 축구사"에서 한국을 "아시아의 유고"라고 평해놓았다. 그다지 좋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수준급의 선수가 끊임없이 배출된다는 점, 그렇게 길러낸 우수한 인재들의 해외진출을 억압함으로써 축구실력을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는 방책을 외면한다는 점에서 두 나라는 너무나 닮은 꼴이라는 것이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바뀌었지만 유고의 경우 80년대까지는 30세 이후,90년대 초에는 27세 이후에나 해외진출을 허가해주었다. 유럽 주요국에서 비싼 값을 주고서라도 데려가고 싶어하는 쓸 만한 선수들은 국내법으로 발을 묶어놓고, 유통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 폐차 직전의 중고품들만 시장에 내놓고 있었던 셈이다. 이같은 상황에도 불구하고 유고선수들이 해외로 거듭 진출할 수 있었던 이유는 선수들의 몸값이 상당히 저렴했기 때문이다.

 

한국도 마찬가지, 유럽에서 통할만한 선수들은 구단이 이적료 문제로 발을 묶어놓는다. 실은 팀의 전력에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선수이기 때문에 팔 수 없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유럽진출이 사실상 어렵게 된 노장 선수들만 좀 더 비싼 가격에 팔 수 있는 J리그에 내놓고 있었던 셈(유럽의 상황에는 무지한 채 J리그에만 밝은 에이전트때문일지도 모르지만)이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한국선수들이 유럽으로 진출하기란 매우 힘들었고 그만큼 한국축구의 발전을 더뎌질 수 밖에 없었다.

 

그나마 최근 월드컵붐을 타고 실력을 검증 받은 송종국, 박지성 등 많은 선수들이 유럽진출에 성공한 것은 매우 희망적인 사실이다. 물론 최근 이을용의 예처럼 유럽진출이 무조건 좋은 면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나 좀 더 큰 무대에서 자신의 한계를 시험해 볼 수 있는 기회조차 주지 않는다면 언제까지나 우물 안 개구리와 같이 현재 자신의 모습에 안주하며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 채 그대로 시들어갈 것이다.

 

 

만약...

리 티에와 이나모토의 활약이 올시즌만으로 끝날지는 모르겠으나, 유럽진출을 희망했지만 구단의 반대 등으로 끝내 이루지 못한 홍명보와 대비되며 많은 여운을 남긴다. 이미 지난 일에 '만약'을 덧붙이는 것이 허망한 일임에도, '만약 홍명보가 유럽에 진출했더라면?' 하는 시나리오를 자꾸만 그려보게 된다. 만약 홍명보가 구단과 축구협회의 지원 아래 유럽 진출을 성공했더라면, 적어도 모로코의 나이베트 정도의 활약은 보여주지 않았을까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홍명보가 만일 지금 다시 축구를 시작한다면 세계 최고의 선수가 될 것으로 확신한다. 유럽에서 백만장자가 될 수 있는 자질이 있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는 점이 아쉬울 뿐이다.”

 

– 인터내셔널 해럴드 트리뷴(IHT)의 칼럼니스트 랍 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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