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중일기 중 발췌 2월 19일 [양력 4월 1일]<경술>
맑다. 순찰하러 떠나 백야곶(여천군 화양면 백야도)의 감독관이 있는 곳에 이르니, 승평부사 권준(權俊)이 그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렸다. 기생도 와서 종일 같이 놀았다. 비가 온 뒤라 산의 꽃이 활짝 피어 경치가 멋져 형언키 어렵다.
3월 9일 [양력 4월 6일]<병자>
아침에 맑다가 저물 때에 비가 내렸다. 우우후 및 강진현감이 돌아가겠다고 하므로 술을 먹였더니 몹시 취했다. 우우후는 취하여 쓰러져 돌아가지 못했다. 저녁에 좌수사 가 왔기에 작별의 술잔을 나누었더니 취하여 대청에서 엎어져 잤 다. 개(介 계집종의 이름인 듯)와 같이 잤다.
9월 19일 [양력 11월 8일]<임자>
바람이 세게 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아침에 행적(行迪)이 와서 봤다. 진원(珍原)에 있는 종사관의 편지와 윤간(尹侃) 봉해의 문안 편지도 왔다. 이 날 아침 광주목사(최철견)가 와서 같이 아침 식사를 했다. 이어서 술이 나와 밤을 먹지 않아서 취해버렸다. 광주목사의 별실에 들어가 종일 몹시 취했다. 최철견의 딸 최귀지(崔貴之)와 잤다.
9월 12일 [양력 11월 1일]<을사>
바람불고 비가 많이 내렸다. 저녁나절에 길을 떠나 십리쯤 되는 냇가에 이르니, 이광보(李光 輔)와 한여경(韓汝璟)이 술을 가지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 서 말에서 내려서 같이 이야기하는데 비바람이 그치지 않았다. 안세희(安世熙)도 왔다. 저물 무렵에 무장(茂長)에 이르렀다. 여진 (女眞)과 잤다.
9월 14일 [양력 11월 3일]<정미>
맑다. 하루 더 묵었다. 여진(女眞)과 두번 관계했다.
9월 15일 [양력 11월 4일]<무신>
맑다. 체찰사가 현(무장현)에 이르렀다고 하므로 들러가 절하고 대책을 의논했다. 여진(女眞)과 세번 관계했다. 여진(女眞)이 아파 울었다.
2월 12일 [양력 3월 10일]<기유>
맑다. 일찌기 창녕사람이 웅천 별장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살대(箭 竹) 쉰 개를 경상수사에게 보냈다. 저녁나절에 수사가 와서 같이 이야기했다. 저녁에 활을 쏘았다. 장흥부사․흥양현감도 같이 쏘다가 어둘 무렵에 헤어졌다. 나이 젊은 계집들은 하루종일 같이 놀다가 초저녁에 돌아갔다.
3월 5일 [양력 4월 2일]<임신>
맑다가 구름이 끼었다. 새벽 세 시에 출항하여 해가 뜰 무렵에 견내량의 우수사가 복병 한 곳에 이르니, 마침 아침먹을 때였다. 그래서 밥을 먹고 난 뒤에 서로 보고서 다시 잘못된 것을 말하니 우수사(이억기)는 사 과를 마다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 일로 술을 마련하여 잔뜩 취하여 돌아왔다. 그 길에 이정충(李廷忠)의 장막으로 들어가 조 용히 이야기하는데 취하여 엎어지는 줄도 깨닫지 못했다. 비가 많이 쏟아지므로 먼저 배로 내려가니, 우수사는 취하여 누 워서 정신을 못차리므로 말을 못하고 왔다. 우습다. 배에 이르니, 회․해․면․울(蔚) 및 수원(壽元) 등이 함께 와 있었다. 비를 맞으며 진 안으로 돌아오니, 김혼(金渾)도 왔다. 같이 이야기하다가 자정이 되어 잤다. 계집종 덕금(德今)․한대 (漢代)․ 효대(孝代)와 은진(恩津) 네명과 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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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 中 발췌이다. 충무공은 밤일 외에도 난중일기에 120회 가량 음주기록을 적었는데, 이 기록으로 예를 들어 이순신 장군은 술이 굉장히 강했을거라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칠천량에서 원균이 대패했을때는 거의 두달간 술을 내리 마셨다한다. 또 본문에 나오듯이 강진현감에게 술을 먹여 뻗게 한 적도 있다. 반면에, 일기 중에는 토사곽란(급성 설사, 복통) 등으로 고생했다는 기록도 많은 것으로 충무공 병약설 ( 대표적인 사례가 이우혁의 "왜란종결자") 을 주장하는 이도 있다. 참고로 이 일기에서 "잤다" 는 표현은 실제로 그냥 잠만 잤다는 의미일수도 있으므로 지나친 성적인 상상은 자제하자. '관심사 > 책'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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