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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팬클럽스포츠/야구 2008. 5. 22. 02:25해태 타이거즈의 마지막 팬클럽
스포츠 레푸블리카
2007/06/05 16:44
http://blog.naver.com/quixote80?Redirect=Log&logNo=40051051584
이 글은 상기 사이트에서 퍼온 글입니다.
한국 프로야구는 전두환의 힘찬 시구와 함께 시작되었다. 각하, 대단하십니다. 뭘 이쯤이야. 역사적 살인귀가 피묻은 손으로 던진 공은 보좌관들과, 심판과, 선수들과, 관중들의 박수 속에서 축제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 역할을 했고 그 해의 프로야구는 만루홈런으로 시작해서 만루홈런으로 화려하게 끝이 났다. 그것보라구 세동이, 국민들은 무지해서 에로영화와 만루홈런이면 다 잊어버린다구. 역시 각하는 천재이십니다, 프로야구 이거 흥행 대박입니다. 뭘 이쯤이야... 아마도 그들은 굳게 믿었을 것이다. 컬러 TV와 에로영화, 스포츠에 정신이 팔린 우매한 민중은 더이상 정치나 복잡한 문제들, 이를테면 80년 광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같은 것들은 관심을 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또한 프로스포츠의 시작이 전국민을 자본주의의 충실한 노예 -프로- 로 훈육할 것이라는 기대도 한몫을 했다. 그들은 허리가 부러져라 열심히 일하거나(OB 베어스) 돈이 많거나(삼성 라이온즈) 정부에 충성스러운(MBC) 자들이 지배하는 아! 대한민국을 원했다. 그들이 꿈꾼 새로운 한국은 껌팔이 전라도인이나 능력없는 패배자들("야구를 통해 인격을 수양하려는 것입니다" -삼미슈퍼스타즈 박현식 감독)은 들어설 자리가 없는 '희망의 나라'였다. 물론 그 생각이 큰 오산이었음이 드러나는데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지만.
1983년 해태 타이거즈가 우승하는 순간 전두환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어이 세동이, 그 동네 야구하는 놈들은 내버려둔거야? 각하, 그때 좀 날리는 애들은 서울 와서 실업야구 하고 있었습니다. 그랬어? 과연, 그랬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광주 출신 야구선수들은 1982년 돌아온 고향이 폐허로 변한 것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허름한 구장과 촌스러운 유니폼, 부족한 재정 지원 속에서 그들은 이를 악물고 운동장을 뛰었다. 관중들도 마찬가지였다. 차마 입 밖으로 말이 되어 나올 수 없는 막막함과 울분은 야구장에서의 격한 함성이 되어 광주구장 특유의 사나운 공기를 만들었다. 베어스의 팬들이 흥겨움으로 환호성을 질렀다면, 타이거즈의 팬들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분노를 응원으로 표출했다. 야구장 밖에서는 사투리조차 마음놓고 쓰지 못할 정도로 자신들의 정체성을 감춰야 했던 전라도인들이지만, 야구장 안에서만큼은 원없이 고향 팀을 응원할 수 있었다. 당초 지역주의 강화를 목표로 출범시킨 프로야구였지만, 놀랍게도 타이거즈 팬은 전국 어느 구장을 가도 넘쳐났다. 서울 경기에서는 홈팀보다 타이거즈 응원이 더 크게 들릴 정도로, 전국 각지의 타이거즈 팬들은 자신들의 모든 욕망과 분노를 야구에 투사했다.
한편으로는 전두환의 책략이 맞아 떨어졌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광주의 정치-사회적인 에너지가 야구에 대한 열정으로 '전환'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른 각도에서 보면 전두환의 계획은 철저한 패배를 당했다고 해야 한다. 가령 가난하고 힘없고 빽없는 팀인 해태나 삼미의 선전은 돈이 반드시 성공을 가져오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입증한 것이다. 프로야구를 우월한 자가 승자가 되고 승자가 독식하는 세계화의 산 교육장으로 만들려고 했던 계획은 거지 구단의 악으로 거둔 승리 앞에서 초라해지고 말았다. 게다가 서울이나 다른 지역 토박이들 중에서도 해태 팬이 생겨나면서(반대로 광주인이 삼성팬이 된 사례도 있을 것이다) 지역주의 강화라는 목적도 실패했다. 사람들은 해태가 보여주는 놀라운 근성과 경기력 앞에서 지역 같은 것은 상관없이 팬이 되기 시작했다.
무엇보다도 프로야구의 창시자는 스포츠가 정치-사회적 큰 그림의 알레고리 기능을 할 수도 있음을 간과했던 것 같다. 프로야구는 겨울에는 게임을 하지 않는다. 시즌 내내 활활 타오르던 응원의 에너지가 겨울 동안에는 다시 정치-사회적 에너지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몰랐던 것일까. 해태는 1986년부터 4년 연속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했고, 87년 6월에는 태양이 유독 강하게 내리쬐었으며, 그로부터 얼마 후 프로야구의 창시자는 권좌에서 물러났다. 세상 모든 일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면 우연이고, 필연이라고 생각하면 필연인 법이다.
아무튼 이후로도 해태는 계속해서 이겼다. 최고의 스타들로 짜여진 1993년의 삼성을 상대로는 신인인 이종범이 날아다니면서 이겼고, "동렬이도 없고"하며 엄살을 떨던 1996~7 시즌에는 한물 갔다고 여긴 김정수나 다른팀 가면 써주지도 않을 강태원 같은 선수들을 앞세워 또다시 2년 연속 우승을 거머쥐었다. 가진 것 없고 비빌 언덕 없는 자들도 피나는 노력을 기울이면 성공할 수 있는, 좋았던 시절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리고 해태의 우승 헹가래가 있은지 두달 뒤인 1997년 12월, 한국은 IMF 체제로 돌입한다. 기업의 도산과 정리해고와 자살과 금모으기 운동이 연달아 이어졌다. 서로 다른 출발점에서 시작해도 노력만 하면 따라잡을 수 있던 시대는 가고, 이제는 정말로 우승열패의 시대, 남보다 앞서야 모든 것을 거머쥘 수 있는 시대, 남을 잡아먹어야 이길 수 있는 시대, 한번 패배자는 아무리 죽었다 깨어나도 승리자가 될 수 없는 배틀 로얄의 시대가 문을 열었다.
우연일까 우연이 아닐까. 해태 타이거즈의 하락세가 다름아닌 1998년부터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우연일까 우연이 아닐까. 해태 타이거즈의 침체기가 사상 첫 호남 출신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해태는 놀랍게도 1998년 '사상 처음으로' 시즌 5위에 머물렀고 1999년과 2000년에도 4위에 그치는 부진을 보였다. 처음 보는 타이거즈의 무기력한 모습에 언론과 팬들 사이에서는 과거의 '헝그리 정신'이 사라졌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사실일까. 1998년부터 프로야구에는 외국인 선수 제도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한수 위의 기량을 지닌 외국인 선수의 활약은 각 구단의 시즌 성적을 좌우할 만큼 큰 영향를 끼쳤다. 그리고 돈많은 구단들은 얼마든지 뒷돈을 쥐어주며 더 뛰어난 외국인을 기용하는 일이 가능했다. 숀 헤어 따위를 데려다 기용한 해태가 상대가 될리 만무했다. 게다가 창단한지 얼마 안된 현대 유니콘스는 재정이 어려운 팀의 수준급 선수들을 현금 트레이드로 끌어들이면서 급속도로 전력을 보강해 나갔다. 결국 1998년 한국시리즈 우승은 현대가 차지했다. 프로야구도 1998년을 기점으로, 돈 많은 구단이 승리하는 새로운 문화가 정착한 것이다. 나는 당시 현대의 우승을 생각하며 도산 위기에 처한 기업들을 마구잡이로 인수 합병하던 1998년의 재벌과 외국기업들을 떠올렸다. 그리고 여관방을 숙소로 삼고 부대찌개로 영양을 보충하며 뛰던 쌍방울 레이더스의 마지막 모습도 기억한다.
또 하나 간과하지 말아야 할 점은, 1999년부터 시작된 자유계약선수 제도다. 외국인 선수 제도에 이어 도입된 FA 제도는 가난한 구단에게는 치명타와 같았다. 이미 해태는 1999년 시즌 전 에이스인 임창용을 삼성 양준혁과 현금을 포함한 3:1 트레이드로 보낼만큼 자금 사정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FA 자격을 얻은 스타급 선수를 데려올 여력도, 자신들 팀 소속 선수를 붙들 여력도 해태 타이거즈에는 없었다. 결국 해태는 모기업인 해태제과가 2001년 매각되면서 야구단 운영에서도 손을 떼게 되고, 타이거즈의 전통은 IMF를 리바운딩의 기회로 삼은 대기업 기아에게 넘어갔다. 껌팔고 빙수 팔아 운영하던 시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풍부한 자금력을 지닌 기업이 타이거즈를 인수하자, 광주 팬들은 기대 반 걱정 반의 눈길로 새로운 팀을 바라보았다. 기아는 산뜻한 새 유니폼(?)과 세련된 엠블럼, 그리고 프랜차이즈 스타 출신의 새 감독인 김성한을 앞세워 팬들의 충성심을 붙잡으려 애썼다.
기아의 창단과 함께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2000년까지 해태 감독을 맡으며 9차례 팀을 우승시킨 김응룡이 삼성 라이온즈의 감독으로 자리를 옮긴 것이다. '삼성 라이거즈'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던 김응룡의 감독 선임은 2002년 삼성의 사상 첫 한국시리즈 우승으로 빛을 발했다. 또한 해태의 국보급 투수로 한동안 야구계를 떠나있던 선동렬까지 2003년부터 삼성 투수코치를 맡게 되고, 조계현과 이순철 등도 선수 내지는 코치로 삼성에 몸담게 되면서 해태의 전성기 멤버들이 최대 라이벌팀으로 적을 옮기는 웃지 못할 사태가 벌어지게 된다. 이처럼 한때 적으로 삼았던 세력에 몸담는 일은 단지 야구에서만 벌어지는 상황이 아니다. 정치에서도 진보 운동가 출신들이 보수 정당 의원으로 정치에 데뷔하는 상황이 종종 벌어지고, 학생 운동을 했던 사람들이 재벌 기업에 입사하거나 논술 학원을 차리는 경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비유는 어디까지나 비유일 뿐이다). 삼성-현대가 대표하는 자본의 힘은 폭풍처럼 휘몰아치며 우수 FA 선수들과 수준급 외국인 선수를 싹쓸이했고, 급기야는 해태 타이거즈의 심장부에까지 손을 뻗쳤다. 대통령 식으로 말하자면, 야구판에서도 "권력은 시장으로 넘어갔"다.
아무튼 기아로 모기업이 바뀐 이후, 타이거즈는 더이상 예전의 매섭고 근성있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다. 다시한번 사회학적인 해석을 하자면, 나는 이런 타이거즈의 부진이 더이상 야구가 한풀이 수단이 아닌 광주의, 그리고 현재의 시대를 반영한다고 생각한다. 야구는 더이상 선수들에게나 팬들에게나 억압과 울분을 발산하는 유일한 수단이 아니며, 사실 '정권교체' 이후로는 그럴만한 정치적인 분노도 희미해진게 사실이다. 대신 전두환의 총과 탱크가 위협하던 자리에는 그보다 더 잔인하고 무서운 자본과 무한 경쟁이 들어섰고, 이제 아무리 피나는 노력과 열정을 쏟아도 도저히 앞서가는 자들을 따라잡을 수 없는 살벌한 시대가 시작되었다. 강태원이나 송유석처럼 평범하기 그지없는 우리 범부들은, 더이상 아무리 허리가 부러져라 애를 써도 결코 선동렬이나 김성한처럼 될 수 없다. 경쟁에서 이탈된 보통 사람들은 자포자기한채 지시에 순종하며 묵묵히 살아가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지금 여기, 꼴찌로 추락해버린 기아 타이거즈의 모습은 어쩌면 신자유주의의 바다 위에서 난파된 보통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끔찍한 일이다. 야구에서까지 꿈과 낭만과 정열 대신에 돈이 승리를 차지한다는 사실은. 20년 삼성 팬인 내가 올시즌 기아 타이거즈의 부활을 바라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나는 최소한 야구에서만큼은, 돈이 아닌 인간이 승리하는 모습을 보고 싶다. 그것이야말로 프로야구의 창시자와 피도 눈물도 없는 신자유주의에게 복수하는 길이 아닐까. 때마침 6월이다. 87년 6월처럼 올해의 6월도 광주구장이 뜨겁고 기쁨에 넘치기를 바란다.
"낭만 없는 승리는 숫자에 불과하다" Copyright By 기호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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